높으신 분들이 모이는 자리라는 압박감이 사용인들의 어깨를 내리 누르고 있었다. 종종거리는 발걸음 중에 먼지라도 채여 넘어질까 두려워하는 것도 같았다. 푸른 장식이 조금 줄어든 입구는 태양에 도전하듯 빛을 뿜었다. 실버는 이른 아침부터 자라드와 함께 그 분주한 장면을 관람하듯 내려다 보았다. 불안감인지 어떤 익숙한 불쾌감인지, 그녀는 계속해서 검 손잡이를 만...
실버는 그대로 도망쳤다. 수년만의 도망이었다. 그것은 재상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수치도, 샹들리에의 조명 때문도 아니었다. 과거를 보였다는 두려움이었다. "헉, 허억," 한참이나 뒤를 쫓아오던 폴의 구두소리도 어느새 뚝 끊어졌다. 자신을 향한 발걸음이 끊어졌음에 안도하면서도, 그날 그 절벽에서의 기분과 동일하게 느꼈다. 그래, 모순적인 인간이었나보다. 지...
자라드는 브렉에 대한 긴장을 놓지 않았다. 부강해지는 국력으로 자신감이 채워졌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자만으로 변질시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신중하고, 현명한. 하지만 리우드가 불러주었던 노랫말 만큼은 그를 끊임 없이 흔들었다. 그에게 이번 연회는 굉장히 중요했다. 귀족들의 환심을 살 정책들과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덫. 그것들의 기반이 될 소문의 문을 열 ...
"…네?" "누가 보면 진짜 결혼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 재상." 멍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폴의 표정을 읽은 실버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호위 업무가 있는데…" "전하께서 샴페인 한잔을 무어라 하실 분인가. 하루 즐기라 하는걸 사양하고 온 참인데." "……." 폴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가 이내 침울해 졌다. 종잡을수 없는 변화에 실버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실버는 그 소리에 급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그녀는 커다란 방 안으로 박차고 뛰어들어갔다. 하지만 걱정했던, 피가 잔뜩 튄 벽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툭, 그저 앉아 있던 카터의 몸에서 가죽 속박줄이 떨어져 내려간 것 뿐이었다. 자라드가 벤 것은 카터의 목이 아닌, 그를 잔뜩 조이고 있던 가죽 끈이었다. 은발의 사...
차라리 아버지가 희대의 악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대륙을 굽어살피는 어진 황제가 꿈이 아니라, 피의 정복자가 되어 모든것을 재패하는. 만화에나 나오는 악당이었으면 좋았겠다 매일 밤 생각했다. 브렉은 카터가 감옥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미친듯이 마물을 죽이다 약에 취해 며칠을 흘려보냈다. 각종 밀거래상에서 들여온 희귀한 풀들은 그가 지옥같은 과거의 기억...
그녀는 부드럽게 왕의 팔을 쓸었다. 검은 입자들이 조금씩 떨리는 자라드의 손을 천천히 어루만지는것 같았다. "이런, 아버지는 내 아버지라 이건가.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려 들었어 내가." 그는 실버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조용히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카터의 목을 쥐어 비틀던 생경한 감각이 떠올랐다. 피식, 하고 헛웃음이 새어나오는것을 막을 수 없었다. "쓸데...
새벽, 편히 쉬지 못했던 말이 속도를 내지 못하자 자라드와 실버는 잠시 멈추었다. 그는 그것의 갈기를 쓸어주며 눈을 맞추었다. "지쳐보이는군." "지쳐보이십니다." 실버는 자라드와 눈을 맞추었다. "그대 생각보다 멀쩡해." "아닌 것 같습니다." "할 일이 많아. 서둘러 가야하는데 말이야…." 실버의 말은 단칼에 무시해버린 자라드가 제 가슴팍에 머리를 부벼...
그들은 한참이고 이야기를 나누다 해가 떠오르려 할때 쯤에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젊은이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들이 어깨를 돌려 문으로 향할 때 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까 나는 어떻게 모두 아느냐 했지." 실버가 당황해 대답했다. "무례하게 굴어 죄송했습니다." "아니, 그것이 당연하지. 내 동생이 그의 사형을 주관했었다. 내게 편지를...
만남의 시간은 충분히 깊었다. 자라드 역시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자세를 고쳤다. "팔을 다쳤니?" "…네." 노인의 주름진 눈가가 더욱 깊게 패였다. "좋지 못한 기운이구나. 흑마법인가, 쯧." 자라드는 고개를 살짝만 끄덕이는 걸로 매듭 지었다. 지금 욱신거리는건, 몸도 마음도 아니었기에. 모호한 경계가, 다가올 형체없는 무언가가 크게 욱신거릴 뿐이었다. "...
자라드가 무작정 들어가려 하자 실버가 막아섰다. 실버는 한손으로 검을 그러쥐고, 다른 한 손으로 다 비틀린 낡은 나무 문을 밀었다. 그녀가 자라드에게 낮게 속삭였다. "확실히 여기가 맞습니까?" "여기로 오라는 뜻이었다. 확실해." 끼이익- 그 기이한 소음은, 마치 오랜시간 써오지 않은 톱니가 급작스러운 압력에 겨우 돌아가며 내는 소리 같았다. 자라드는 주...
격렬하게 움직여대는 말을 타고, 실버는 자라드 트위츠. 아니 자라드 발데리에 대해 생각했다. 첫 만남을 떠올리니 그의 불안과 불면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싶었다. 다 부서졌던 저를 거두어서 멀쩡해 보이는 기사로 탄생시킨 게 한동안은 자라드 덕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사람과 환경이었다. 마물과, 늪과, 피와, 검이 아닌 해와 달이, 색색의 머리카락과 ...
소설 [죽은 장작에게] 연재중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